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르투갈 백작령 (문단 편집) === 포르투갈 제1백국 === 868년, [[갈리시아]] 귀족 [[비마라 페레스]]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국왕 [[알폰수 3세]]의 지시에 따라 도우로 강 하구의 [[포르투]]를 공략하고 초대 포르투갈 백작에 선임되었다. 이후 아랍군을 상대로 지속적인 공세를 벌인 끝에 871년 몬데구 강변의 [[코임브라]]를 공략했다. 약 5천의 인구를 지녔던 코임브라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재정복'한 첫 대도시였다. 873년 비마라 페레스가 사망한 후, 비마라의 아들로 추정되는 [[루시디오 비마라네스]]가 알폰수 3세에 의해 포르투갈 백작에 선임되었다. 878년 [[후우마이야 왕조]]군이 오포르토와 코임브라를 공격해오자, [[갈리시아]] 귀족 헤르메네길도 구티에레스와 함께 물리쳤다. 헤르메네길도 구티에레스는 갈리시아인들을 브라가, 비세우, 라멩고 등지에 이주시켰다. 이후 헤르메네길도 구티에레스의 후손들은 대대로 코임브라 백작을 칭했다. 루시디오 비마라네스는 910년 루고 일부를 영지로 삼았고, 이듬해에는 두메의 감독관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왕실 의회의 일원으로서 887년에서 917년 사이에 아스투리아스 헌장에 여러 번 이름을 실었다. 922년경 루시디오 비마라네스가 사망한 뒤, [[레온 왕국]]의 귀족 데자 백작 곤살로 베토테스의 아들인 [[헤르메네길도 곤살베스]]가 포르투갈 백작에 선임되었다. 그의 통치에 대한 기록은 943년까지 포르투갈 지역의 성당과 수도원에 여러 차례 기부했다는 것 외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루시디오는 생전에 카스티야 백작령에서 포르투갈 백작령으로 이주한 귀족 디오고 페르난데스의 딸 [[무마도나 디아스]]와 결혼했는데, 무마도나가 남편 사후 여백작으로 취임하여 포르투갈 백국을 통치하다가 950년 후반에 여섯 자식에게 영지를 골고루 양도하면서 장남 [[곤살루 멘데스]]를 포르투갈 백작에 선임했다. 곤살루 멘데스는 964년 아내 일두아나 파이스와 함께 모레이라 데 코네고스 와 카스타 네이라 마을을 어머니 무마도나가 세운 기마랑이스 수도원에 기부했다. 한편 [[레온 왕국]]에서 [[오르도뉴 4세]]와 [[산추 1세]]의 내전이 한창 벌어졌을 때 오르도뉴 4세를 지원했다가, [[후우마이야 왕조]]의 지원에 힘입어 내전에서 승리한 산추 1세에게 미움을 사고 말았다. 966년, 산추 1세는 그의 영지로 쳐들어가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고 그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그러나 그해 12월 19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레온 왕국의 성직자이자 학자였던 삼피로의 연대기에 따르면, 신추 1세는 곤살루가 바친 독이 든 사과를 먹고 독살당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 뜬 소문을 그대로 믿고 적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968년 갈리시아의 귀족 로드리고 벨라스케스의 친척이자 산 마르티뇨 데 파소의 수녀원장인 군트로다가 산타 콤바 수도원을 강제로 빼앗았다. 이 수녀원의 본 주인이던 오도리노가 도움을 요청하자, 무마도나는 아들 곤살루와 라미루를 통해 군트로다에게 "volens nolens(원하든, 원하지 않든)" 수도원을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군트로다가 이에 불응하고 로드리고에게 구원을 요청하면서 두 가문의 전쟁이 벌어졌고, 곤살루가 로드리고를 아귀온차 전투에서 격파하면서 종결되었다. 982년 레온 왕위에 오른 [[베르무두 2세]]는 로드리고의 아들이자 이리아 프라비아 교구의 주교인 펠라요 로드리게스를 해임했는데, 그가 이 일에 관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981년, [[라미루 3세]]가 루에다 전투에서 후우마이야 왕조의 사령관 [[알 하지브 알 만수르]]에게 참패했다. 만수르는 여세를 이어가 레온 왕국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고, 982년에 수도인 레온에 입성하여 철저히 파괴했다. 알 만수르의 침략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는 왕을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한 곤살루는 갈리시아와 포르투갈 귀족들을 규합해 982년경 [[오르도뉴 3세]]의 [[사생아]] [[베르무두 2세]]를 갈리시아 왕으로 옹립하며 반기를 들었다. 베르무두 2세는 982년 봄과 여름에 갈리시아 전역을 공략하며 위세를 떨쳤다. 라미루 3세는 이를 진압하고자 출진했고, 983년 초 양자는 갈리시아의 안타스 데 울라 근처 포르텔라 데 아레나스에서 격돌했지만 양측 모두 막심한 피해를 입었을 뿐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베르무두 2세는 이후에도 갈리시아 왕을 자처하다가 985년 라미루 3세가 사망하자 레온과 카스티야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레온 국왕에 선임되었다. 997년, [[알 하지브 알 만수르]]가 이끄는 후우마이야 왕조군이 레온 왕국의 서부 영토를 관통하여 포르투갈과 갈리시아를 파괴하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진입한 뒤 그곳의 대성당을 비롯한 도시 전체를 파괴하고 성당 대문을 가지고 가서 코르도바 모스크에 내걸었다. 곤살루는 이때 사망했다고 전해지나, 만수르와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는지 병에 걸려 사망했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포르투갈 백작에 서임된 [[멘도 곤살베스]]는 999년부터 레온 왕실 헌장에 포르투갈 백작으로 언급되며, 그 해에 5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알폰수 5세]]의 가정교사를 맡는 동시에 알폰수 5세의 어머니 엘비라 가르시아와 함께 왕국의 [[섭정]]을 맡았다. 멘도 곤살베스는 섭정 초기엔 레온 왕국을 연이어 침략하는 알 만수르의 침략에 맞서 싸웠지만 1002년 알 만수르가 사망한 후 1003년 만수르의 뒤를 이어 후우마이야 왕조의 실권을 잡은 아브드 알 말리크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아랍 측 기록에 따르면, 1004년 레온 귀족 산초와의 분쟁에 시달리던 멘도가 알 말리크에게 분쟁을 중재해달라고 청원했고, 아브드 알 말리크의 대리인이자 코르도바의 판사인 아스바그 빈 아브드 알라 빈 나빌이 멘도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1007년 산 페드로 데 로카스 수도원에 기부한 사실이 수도원 기록에서 확인되었다. 중세 아랍 역사가 이븐 할둔(Ibn Khaldun)에 따르면, 멘도는 1008년경 '폭력적인 상황'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포르투갈의 중세 역사학자 호세 마토수(1933 ~)는 그가 권력 분쟁에 휘말려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일부 학자들은 후기 아이슬란드 사가 <헤임스크링글라>에 [[바이킹]] 지도자 올라프 하랄드손이 군발드스보르그(Gunnvaldsborg)를 공격했다는 문구에서 군발드스보르그가 "곤살레스의 도시(Gundisalvus-burgus)를 의미하고, 멘도가 통치하던 도시 투이를 나타내는 지명이라고 보고, 멘도가 바이킹의 침략으로 피살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주장을 명확하게 증명할 명확히 증명하는 기록이나 유적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근거없다고 간주한다. 멘도 곤살베스 사후 2대 포르투갈 백작인 [[루시디오 비마라네스]]의 아들 알비토 루시디스의 손자 [[알비토 누녜스]]가 백작에 선임되었다.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1016년 바이킹의 침략을 받고 베르모임으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살해당했다는 것뿐이다. 장남 [[누누 알비테스]]가 뒤이어 백작에 올랐고, 모종의 시기에 결혼한 [[일두아라 멘데스]]를 공동 백작으로 세워 백국을 함께 다스렸다. 1028년 누누 알비테스가 사망한 후, 일두아라 멘데스는 장남 [[멘도 누녜스]]를 포르투갈 백작에 선임하고 1043년까지 [[섭정]]했다. 멘도 누녜스는 1050년에서 1054년 사이까지 포르투갈 백국을 통치했는데, 그의 치세 동안 레온 국왕 [[페르난도 1세]]가 포르투갈 백국의 중심지인 [[기마랑이스]] 일대에서 고메스 엑타스와 디오고 트루크테신데스 등 하급 귀족들을 행정직에 선임하는 방식으로 포르투갈 백국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멘도 누녜스의 아들로서 포르투갈 백작에 취임한 [[누누 멘데스]]는 1062년 페르난도 1세가 고디노 베네가스를 포르투갈 총독으로 선임해 직할 통치를 실시하는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065년 페르난도 1세가 사망한 뒤 그의 세 아들 [[산초 2세]], [[알폰소 6세]], [[가르시아 2세]]가 아버지의 영역을 세 개로 나눠서 통치했다. 이때 갈리시아와 포르투갈 백국은 가르시아 2세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세 형제가 서로를 꺾고 영역을 확장하려는 야심을 품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자, 누누 멘데스는 이 때를 틈타 독립하기로 마음먹고 1070년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1071년 페드로소 전투에서 가르시아 2세의 진압군에 참패하고 전사했다. 그의 영지는 몰수되었고, 나중에 페르난도 1세의 영토를 통합한 알폰소 6세가 포르투갈의 총독으로 임명한 부하 시스난도 다비데스에게 넘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